긋기, 지우기, 뒤바꾸기, 넘나들기






긋기, 지우기, 뒤바꾸기, 넘나들기
홍주이
Joo-e Hong
eejoo210@gmail.com
<긋기, 지우기, 뒤바꾸기, 넘나들기>는 인간 존재와 삶을 ‘풀’로, 세상을 ‘풀숲’으로 표현한다. 주재료는 톱밥으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부산물인 톱밥이 특별한 존재인 주산물이 되어 작업의 재료로 재생산되는 것은 평범함과 특별함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지점이다. 또한 인간의 형상으로 치환된 풀 가닥과 그들로 이루어진 풀숲은 원경과 근경의 차이를 통해 이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한다. 원경에서 풀숲처럼 보이는 작품은 근경에서는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임을 발견할 수 있다. 또 톱밥 반죽의 불규칙한 발림과 반죽이 수축하며 곳곳에 만들어낸 예측 불가능한 ‘틈’은 작품 속 대상들에게 고유함을 부여한다. 작품에서는 이렇게 평범함과 특별함의 경계를 허물고, 재정립하고, 뒤바꾸는 과정을 반복한다.
인간은 대개 사회에 소속되어 구성원으로서 살아간다. 사회는 으레 구성원들에게 갖은 요구를 하고 구성원들은 그에 알맞게 맞춰지는 과정을 겪는데, 이 요구들은 때때로 모순적이어서 개인에게 심리적 혼란을 초래한다. 그리고 이런 혼란은 ‘평범함’과 ‘특별함’이란 개념에 의문을 품게 한다.
‘특별함’과 ‘평범함’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평범함 혹은 특별함으로 나뉘어 분류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인간 존재와 삶의 본질에 뿌리를 둔다. 인간은 모두 같은 크로노스적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속에서 각자가 만들어내는 시간과 흔적은 결코 같지 않다. 물리적 시간과 개개인의 고유한 시간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 존재와 삶이 평범함과 특별함, 두 성질을 모두 내재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인간 존재와 삶이 가진 이러한 이원성은 ‘풀’과 닮아 있다. ‘풀’이라고 뭉뚱그려 불리는 초록빛의 식물은 대개 덩어리로 뭉쳐 보인다. 그러나 가닥 하나하나 살펴보면 길이, 두께, 모양까지 모두 다르다. 이렇듯 풀과 인간은 보통의 것들 중 하나로 평범하기도 하지만 존재 자체로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특별함을 지닌다.